Feeds:
Posts
Comments

Archive for September, 2010

감당해주는 사랑

오늘 어느 한중보자와의 교제를 속에서 잊지못할 내용을 기억한다.
“주님이 내 안에서 찾으시는 의는 다른것이 아닌 바로
내 주위의 영혼들을 감당해주는 것일겁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질수있도록 안아주고 품어주는
것말입니다”. 십자가로 우리의죄를 감당해주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것이 아닌가!
가까운 가족과 이웃을 잘 감당치 못한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Read Full Post »

수정과 같이 맑은 성령의 생수 그시대가 오고 있다.

주님, 수정과 같이 맑은생수의 강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시대에 주님의 생명수를 받아 생명과 나무로 자라가서 열방을 치유하는 생명과 나무로 자라갈수있도록 도와주세요.

Read Full Post »

물두멍

내 마음의 노래

최근 나의 신앙의 가치관에 많은 도전과 변화를 준 책을 소개한다.  

이책을 읽으면서 꼭 우리가 성령의 생명수를 마셔야 해야하나라고 질문했다. 결론은 이시대에 성령(생명수)의 도움 없이는 영적전쟁에서 무기(성령의 검)가 없는 군사와 같은 모습이 될수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그럼 뭐가 이책의 메시지에서 특별한것이란 말인가? 결론은 이시대에 성령의 생명수는 하나님께서 정결례로 풀어주시는 신부를 준비시키시는 하늘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정결의 물두멍인것이다. 정결례를 위해서 우리가 잔치집/성소에 들어가기전에 꼭 거쳐야하는 손을 씻는 물두멍(아래사진은 사해사본이 발견된 이스라엘 쿰란공동체가 사용한 물두멍 –  그들은 하루 두번 정결례를 치룬다)이 바로 생명수를 담고있음을 의미한다.

나를 보면 실망하고 좌절할수밖에 없지만 십자가를 볼때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가운데 안식을 발견한다. 이젠 구원에서 성화의 물두멍으로 나가는 정결한 군사로 나를 주님께 드린다. 내 마음과 내 영혼을 드린다. 그분이 생명수로 채우시고 그분이 나를 만지시도록 말이다…

Read Full Post »

motivation

http://www.entrepreneur.com/magazine/entrepreneur/2010/march/204984.html

Read Full Post »

예언의 판단적 오류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진리 그 자체 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변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영혼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무너진 부분을 보여주시거나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면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더욱 사랑할 수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기회이다 (물론 그 영혼을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놀라운 사랑의 초대를 대부분 판단이라는 속임에 걸려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을 때가 있다 그 무너진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나 보여주심이 정확하고 안정확하고는 이 사랑의 초대와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그런것들이 정확한 유일한 이유는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정확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보여주시거나 받은 말씀이 정확하다고 해서 사랑해야할 그 영혼이 판단의 대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마치 명백히 간음한 여인을 향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 처럼 말이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실때는 우리를 더욱 깊은 사랑의 경지로 인도해 주시는 사랑의 초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리되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말할 수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 상태를 결론지어서 우리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더욱 깊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것 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깊은 사랑으로 영혼들을 품을 수 있게 하는 놀라운 사랑의 초대도 판단이라는 작은 속임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할 수도있는것이다.

이런 작은 속임들에만 걸리지 않는 다면
 
예언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또 이웃을
더욱 사랑할 수있게 하는 촉매제 역활을 톡톡히 할 것이다
 
왜냐면 원래 예언은 사랑으로
사람의 덕을 세우고
사람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는 것이 때문이다
(고전14:3)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하나 알아 갈때마다
그분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또 그분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사랑위에 뿌리내리지 아니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1
 
 
이렇듯 예언이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랑의 도구이다

Read Full Post »

나는 실제적인 주님의 임재하심을 맛보고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쉽게 주님의 은혜와 임재를 경험했지만

나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별 생각 없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기대하고 준비한 내가

아무런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지 못한 것과 달리

 

쉽게 주님의 은혜를 접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쉽게 방언을 하고 그들이 들었다는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쉽게 은혜를 체험하지만 또한 쉽게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특별하게 나를 싫어하시거나 내가 특별히 죄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향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온갖 회개를 하면서 기도하기를

만약 내게 방언만 주신다면 나는 평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순종할 것이며

단 하루도 주님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서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린 후에도

내게는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나는 주님이 내 곁에 너무나 가까이 계셨으나

그분을 제한하고 방해한 것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처럼 주님이 내가 싫어서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무지해서 주님을 거슬리고 방해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는다..” 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순절 이전이라면, 구약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표현은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롬 7:9)

 

 

또한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롬 8:16)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했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주의 영이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며 우리를 거처 삼으십니다.

 

 

물론 그분이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사실 수도 있으며

우리의 아직 처리되지 않은 이기심과 고집들 때문에 불편하게 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분이 거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은 적절한 용어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고전 12장에 보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7)

 

 

여기서 <성령의 나타나심> 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바로 나타나심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성령을, 주의 영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 안에 오신 그 하나님의 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이나 성령은 같은 말입니다.

표현의 사용에 있어서 약간 다른 뉘앙스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같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영으로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 단순히 거하기만 하신다면,

그리고 밖으로 흘러나와서 해방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 분의 놀라우신 능력과 영광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경험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금 통장에 엄청난 돈이 저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거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결한 삶을 원하며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고 싶어합니다.

죄를 이기고 싶어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거룩하신 그분의 영이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소원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소원들은 거듭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요?

유감스럽게도 그 정도로 끝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망은 있으나 그 이상은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간절함이 있으나 잘 채움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의 비극적인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그 영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영이 흘러나오고 자유롭게 역사한다면

우리의 겉 사람은 주님의 영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소망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놀라운 영광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며 실제적으로 많은 영토를 얻고 전리품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모든 승리들은 오직 그 주의 영의 임하심을 통해서만 왔습니다.

결코 어떤 인간적인 탁월함이나 지도력으로 승리가 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세상의 지혜나 세미나나 테크닉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주의 임재와 그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였을 때

그때부터 승리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 세상과 육체를 이기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의 영의 임하심입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결코 인간적으로 보면

어떤 리더쉽이나 탁월함이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라도 일단 주의 임재와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들은 갑자기 놀라운 주님의 도구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기드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연약하고 비겁하고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당초 자신이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여…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하고 말했을 때 천사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반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큰 용사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끔찍하게 하십니까?

저는 아주 별 볼일 없는 가문의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민족 구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삿 6:11-15)

 

 

 

그러나 천사가 그에게 계속 용기를 불어 놓어주자 그는 말합니다.

“정말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맞습니까? 그러면 증거를 보이세요.”

 

 

그러자 천사는 기드온이 가져온 재물에 불이 임하게 하여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증명합니다.

제물에 임하는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지요..

 

 

그러자 기도온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긍지와 자신감으로 충만했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반응은 바로 이랬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삿 6:22,23)

 

 

 

기드온은 겁이 나서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진짜 천사 맞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그는 과연 강한 용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그렇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명령합니다.

우상을 부수어 버리고 그 나무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기드온은 고민합니다.

 

 

우상을 찍어버리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불순종하자니 하나님이 두렵고..

 

 

그는 망설이다가 하기는 하는데

밤에 몰래 숨어서 우상을 찍은 다음에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것을 안 동네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꾸미지요…

그런데 기드온은 숨고 기드온의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말려서 간신히 기드온은 살아남게 됩니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애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단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싼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으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삿 6:31,32)

 

 

 

자… 이것이 과연 지도자의 모습일까요?

온 민족을 구원할 사람이 자기동네 사람들조차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아버지… 무서워요.” 하고 아버지의 품에 숨어버립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에고… 내 새끼…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도와줄게… ”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가서

열심히 기드온을 변호하고 설득한 결과 기드온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적어도 기드온에게는 그들 앞에 당당하게 서서

“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 일을 행했다. 자 누가 나를 죽일 것이냐?” 하고 외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담대한 위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이지요.

 

 

하지만 얼마 후에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그는 갑자기 담대해지고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소집합니다.

그리고 그의 강력하고 놀라운 모습에 압도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와서 그 수하에 복종합니다.

물론 얼마 전에 그를 죽이려 했던 동네 사람들도 거기에 포함되었겠지요.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두루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 (삿 6: 33-35)

 

 

자, 이 놀라운 변화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방금 전까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한 순간에 갑자기 그런 용감무쌍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족속을 소집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사로잡고 통제하여 지도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분명한 것은 기드온은 아주 소극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영이 임하면서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의 임하심을 전후해서 그는 아주 강력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너무나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던 제자들.

자기들끼리 있으면서도 너무나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던 주의 제자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이 어떻게 갑자기 담대해져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등등한 권세자들 앞에서 그토록 당당해졌을까요?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오직 하나님의 영, 그 영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영에게 사로잡히게 될 때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것,

 

오직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심은 그렇듯

미약한 사람도 강건하고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과연 특별한 사람들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특별한 종류의 사람에게만

그러한 변화의 역사는 가능한 것일까요?

 

 

구약에서는 특별한 기름부음이 있는 이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 그러한 이들만이 주의 임재와 영 속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영으로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 안에 주의 영이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영을 단순히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영을 표현하며 나타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그 놀라우신 주의 영광과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드온과 삼손, 그리고 그러한 지도자들에게 임하셨고

그들 가운데 머물러 계셨으며 그들을 변화시키셨고 사용하신 그 영이

우리 안에 동일하게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을 나타내기만 하면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도구로 쓰여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주님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처럼 간절하게 주를 구하고 찾을 때에

이미 내 안에는 그 거룩한 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 영이 와 있었으며 내가 할 일은 그 영을 표현하고 바깥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때에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나의 사모함을 잘 아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은 인격이시지만 또한 영이시며

그러므로 영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운행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 영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그 영을 방해하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즉 주의 영은 내가 싫어서 임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이 역사하실 수 없도록 제한한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많은 헤맴과 방황과 실패 후에야

나는 이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영을 이미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영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영을

밖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방법이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수 없이 많은 명령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은 말하기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40편 1절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침묵 기도는 깊은 수준의 기도이며 그것은 고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입을 열어서 소리내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서로 눈만 마주쳐도 침묵 속에 있어도 많은 교감을 나눌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로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영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길입니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밤을 새우며 기도에 힘썼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영의 표출에 있어서 소리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나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내주 하시는 주의 영의 흘러나옴을 철저하게 묶어놓은 것이지요..

 

 

또한 영의 표출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 감정을 주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편 6편 8절은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고 요구합니다.

 

 

우리의 감정, 마음을 토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표출하라는 것이지요..

 

 

나는 역시 이 감정의 표출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전혀 익숙하지 않았지요..

감정의 흐름과 영의 자유와 흐름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손을 들고 기도하며 춤을 추라는 표현, 박수를 치라는 명령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표현 역시 내가 가장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참 후에야 자세와 동작이

영의 해방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서 고민을 하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고민이 생기면 머리가 땅에 떨어집니다.

 

 

또한 몸의 자세가 구부러지거나 위축된 사람의 성품이 밝고 건강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듯이 자세는 그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성경의 적극적인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나는 부흥집회에 참 많이 참석했습니다.

부흥집회의 열기는 참 뜨겁습니다.

 

모든 이들이 열심히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분위기가 너무나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따라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이들의 옆에서

마치 이방인과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면 나의 그러한 상태가 영적인 어둠에 많이 묶여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부흥사들이 인격적으로 또한 논리적으로

그러한 영적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납득을 시켜주었으면 참 좋았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부흥사들은 그러한 측면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강대상에서 노골적으로 호통을 치면서

박수를 치지 않으려면 나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그냥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손을 드는 것… 손을 사용하는 것은 영의 흐름과 임재에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특별히 말씀으로 명령하시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손을 얹으셨습니다.

제자들도 대체로 손을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12절에는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다> 고 기록하고 있지요.

 

 

그와 같이 손은 영의 흐름과 부어짐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과 임재 가운데 들어갈 때 손에 일반적으로 강하고 묵직한 느낌이 오는 것이 보통입니다.

 

 

손은 기름부음심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지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손을 드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참 어색하고 쑥스럽고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신경이 쓰여져서 잘 기도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영의 흐름과 나타남과 부어짐에 눈도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말하고 있고

모세의 나이 120세에도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눈의 빛과 선명함은 영의 흐름과 권능의 역사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역시 그러한 부분에 대하여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의 눈은 희미하고 약했고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불안하게 움직였습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도 영의 흐름과 움직임에 장애요소가 되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는 이해가 가지만

나는 주의 영의 임하심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기도하고 추구하면서도

그분을 제한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표현을 싫어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많이 묶여 있었습니다.

 

 

 

내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충만하게 나를 사로잡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입을 통하여 손을 통하여 눈빛을 통하여

몸의 동작과 움직임을 통하여 흘러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나타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그분을 꽁꽁 묶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아가를 가졌다면 언젠가는 해산을 해야 합니다.

태가 열리지 않고 아기를 낳는 방법은 없습니다.

 

 

계란 후라이를 먹고 싶다면 계란을 깨뜨려야 합니다.

계란 껍질을 깨지 않고 속의 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아무런 표현과 깨어짐이 없이 그저 사모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향하여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할 때 우리 안의 어떠한 것이 무너집니다.

마치 여리고가 무너지듯이 우리 안에 어떠한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 계시는 그 놀라우신 영광의 영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우리를 사로잡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주며

이를 통해서 상대방이 방언이 나오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성령 세례를 주는 은사가 있다’ 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방언을 받는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방언은 우리가 새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주시는 영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방언은 주님을 영접할 때

이미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하시며

방언은 그 결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하지 않는 것뿐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뿐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예언, 치유, 지혜 등 모든 형태의 은혜가 이미 와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면에 계시는 주의 영을 풀어놓는 사람이 있고

그 영을 제한하고 표출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문제이며 주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 하루는 손가락을 낳고

그 다음 날에는 발가락을 낳고 그렇게 낳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에 완전한 아기를 낳습니다.

 

 

그처럼 주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셨을 때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 임하십니다.

다만 이를 표현하고 우리 몸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발전시킬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는 십 년이 넘도록 그렇게 비참한 나날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무지 속에서 그저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내었을 뿐입니다. 

 

많은 실패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나는 내주 하시는 주의 영을 실제로 나오게 하며 그 영에 사로잡히게 되는

여러 영적인 원리들을 발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책이나 집회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실패와 고통과 방황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들을 독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들을 사람들이 적용한 결과 아주 쉽게 그 주님의 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간증을 듣습니다.

 

 

방언을 받는 분… 주님의 선명한 임재를 경험하시는 분…

방언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음성을 듣는 사람… 그의 안아줌… 만져주심을 경험하는 사람…

 

 

그러한 주의 가까우심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들은 눈물과 감격 속에서 그들의 삶과 가치관과 모든 것들이

하나씩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한 고백들을 나는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훈련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 주님의 아름다우신 임재와 사랑 속에 잠기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와의 그러한 따뜻하고 행복한 만남을 너무나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 안에 계신 그 주의 영을 결코 제한하지 마십시오.

source from http://cafe.daum.net/HRCkorea

Read Full Post »